주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숫자를 어떻게 계산했을까?
지금은 계산할 일이 생기면 스마트폰을 꺼내 계산기를 누르면 됩니다. 몇 자리 숫자의 덧셈은 물론이고 곱셈이나 나눗셈도 몇 초면 답을 확인할 수 있죠.
하지만 주판도 계산기도 없던 아주 오래전 사람들에게도 계산은 필요했습니다.
잡아 온 동물이 몇 마리인지, 저장해 둔 곡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몇 개 주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뒤에는 세금과 거래량까지 계산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판이 만들어지기 전 사람들은 숫자를 어떻게 세고 계산했을까요?
놀랍게도 그 방법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주판의 기본 원리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사용한 계산 도구는 손가락이었을까?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계산 도구는 바로 자신의 몸입니다.
별도의 도구를 준비하지 않아도 손가락을 하나씩 펴거나 접으면서 수량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이 하나라면 손가락 하나, 다섯 개라면 한 손의 손가락을 모두 펴는 식입니다.
특히 사람에게 손가락이 열 개 있다는 점은 10을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하는 방식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십진법 역시 10을 기준으로 자릿수가 올라가는 체계입니다.
다만 손가락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수가 커질수록 표현하기 어렵고, 계산한 결과를 오랫동안 남겨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몸 밖에서 숫자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돌멩이와 조개껍데기도 숫자가 될 수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은 물체는 훌륭한 계산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 한 마리가 우리를 나갈 때마다 돌멩이 하나를 옮겨 놓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양들이 돌아왔을 때 한 마리씩 들어올 때마다 돌을 다시 옮기면 빠진 양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의 중요한 특징은 실제 물건 하나를 다른 물체 하나와 대응시킨다는 것입니다.
숫자 ‘7’을 종이에 적지 않아도 돌 일곱 개가 있으면 수량 7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돌뿐만 아니라 조개껍데기, 씨앗, 작은 나무 조각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도 비슷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계산은 머릿속의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움직이는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수를 기억하려면 흔적을 남겨야 했다
돌멩이는 수를 세는 데 편리하지만 잃어버리거나 위치가 바뀌면 기록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등장한 또 다른 방법이 물체에 일정한 표시를 남기는 것입니다.
나무나 뼈 등에 선을 하나씩 새겨 수량을 표시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숫자를 빠르게 셀 때 종이에 작대기를 하나씩 그어 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본적인 생각은 비슷합니다.
이런 표시 방식의 장점은 수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냥한 동물이나 물건의 개수처럼 나중에 다시 확인해야 하는 수량을 흔적으로 남길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사람들은 단순히 ‘수를 세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수를 기록하는 방법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계산판에서는 돌의 ‘위치’가 숫자를 바꿨다
수가 커지고 거래가 복잡해지면서 단순히 돌의 개수를 세는 것만으로는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평평한 판이나 바닥에 선 또는 홈을 만들고, 그 위에서 돌이나 계산용 말을 움직이는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도구를 넓은 의미에서 계산판(counting board)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주판과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바로 물체의 개수뿐 아니라 물체가 놓인 위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줄은 1의 자리, 그 옆 줄은 10의 자리, 다음 줄은 100의 자리를 나타내도록 정한다면 작은 돌 몇 개만 가지고도 상당히 큰 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돌 하나 자체가 항상 같은 값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자리에 놓였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우리가 숫자를 쓸 때 사용하는 자릿값과도 연결됩니다.
고대 문명마다 계산하는 방법도 달랐다
계산 도구는 한 지역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를 이용한 기록과 계산 문화가 발달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계산판이나 계산용 말을 활용한 방식이 사용됐습니다.
중국에서도 주판이 널리 사용되기 전부터 막대 형태의 계산 도구를 이용해 수를 나타내고 계산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세계 여러 지역의 계산 도구가 모두 똑같은 형태로 발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각 지역의 숫자 체계와 상업 환경, 기록 방식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도 달랐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고대 계산판을 그대로 ‘최초의 주판’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사람들이 계산을 더 쉽고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돌을 움직이던 방식은 어떻게 주판으로 이어졌을까?
계산판 위에서 작은 돌이나 말을 움직이는 방법은 편리했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판을 기울이거나 잘못 건드리면 계산용 물체가 움직일 수 있고, 이동하면서 사용하기에도 불편했습니다.
그렇다면 계산에 사용하는 알이 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 어떨까요?
알에 구멍을 뚫고 막대에 끼워 움직이게 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판의 핵심 구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판에서는 각각의 알이 막대를 따라 움직이고, 막대마다 자릿값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계산이 끝난 뒤에는 알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고 다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주판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등장한 도구라기보다 수를 세고, 표시하고, 기록하고, 계산용 물체를 움직여 온 오랜 경험이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계산 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판 이전의 계산법을 보면 주판의 원리가 보인다
손가락으로 수를 세는 것과 주판알을 움직이는 것은 겉으로 보면 전혀 다른 행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방법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 돌멩이 하나, 계산용 말 하나가 특정한 수를 나타냈고, 주판에서는 그 역할을 주판알이 담당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자릿값이라는 개념이 더해지면서 적은 수의 알만으로도 큰 숫자를 표현하고 복잡한 계산까지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주판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완성된 주판만 보는 것보다 그 이전 사람들이 숫자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핵심 정리
주판이 만들어지기 전 사람들은 손가락을 비롯해 돌멩이, 조개껍데기, 씨앗, 나무나 뼈에 남긴 표시, 계산용 말과 계산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수를 세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계산판에서는 물체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값을 나타내는 방식이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자릿값을 이용해 주판알을 움직이는 주판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주판은 갑자기 등장한 발명품이라기보다 인류가 오랜 시간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방법을 찾아온 과정에서 발전한 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글 → 「주판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계산 도구의 시작을 따라가다」
다음 글에서는 주판의 발명자를 한 사람으로 특정하기 어려운 이유와 함께 계산판에서 중국식 주판, 일본의 소로반 등으로 이어진 주판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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